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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삶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삶 - (3) 반쪽짜리 자연주의 삶의 시작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삶 (3) 반쪽짜리 자연주의 삶의 시작


소나무 숲길을 지나서 바로 집이 있었다.
마당엔 잔디가 심어져 있었다. 하지만 잔디는 보이지 않는다.
잡초가 너무 자라 무릎을 덮는다. 풀을 헤치고 집으로 들어갔다.
남향, 하루 종일 거실 큰 창으로 볕이 들어온다.
거실에서 바라보면 100미터 정도 앞에 산이 버티고 있다.
의외로 오래된 숲이다. 이름 모를 나무들이 가득 팔을 벌리고 태양을 그리워한다.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데 그 날갯짓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그 소리에 깨닫는다. 너무 조용하다. 

거실 반대편엔 넓은 공터가 있었다. 북쪽 공터. 그 주변은 논과 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 너머로 멀리 산의 능선이 흐릿하게 보인다.
탁 트인 북쪽 들판과 남쪽에 버티고 선 산이 집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잠실역에서 차로 오면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이런 위치에 이런 환경의 집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곰팡이 잔뜩 핀 집과 축사와 다름없는 집을 보고, 포기 직전까지 갔던 우리로서는 이 행운을 실감할 수 없었다.

"이 부근은 개발 제한구역이에요. 원래 지어진 집은 그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새로 증축하거나 짓는 건 허가가 나지 않아요."

작은 문제였다. 그리고 약간 큰 문제도 있었다.

"보증금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부동산 사장님은 경상도 사투리를 진하게 쓰는 60대의 아주머니였다.
근저당이 설정된 등기부 등본을 보여주면서 시원스레 얘기를 한다.
이 부근 땅을 전부 소유하고 있는 집주인이 은행에 저당을 잡히고 대출을 받았는데
그 금액이 우리가 들어가려는 집 보증금의 80% 정도나 된다.
싼 이유가 있었다. 불안해지는 조건이다.

"계약에 문제가 생기면 부동산에서 배상을 해야 하는데 그게 1억 원 짜리에요. 
그러니까 내가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거지요."

사장님 얘기는 그랬다. 우선 근저당이 설정된 사실을 알고 임대차 계약을 하면 
만일의 경우 확정일자를 받았다 해도 100% 보호를 받지는 못한다.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계약하려는 집과 연결된 토지와 다른 건물을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연결된 금액을 환산해보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세입자 입장에서 불안하기 때문에 부동산에서 계약에 대해 보증을 해준다. 
그 금액은 우리가 계약하려는 액수를 넘는다.
결론적으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래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부동산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사장님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문제가 없다면 왜 이렇게 좋은 조건으로 집을 내놓았을까?
일단 집에 돌아가서 자세한 것들을 알아보기로 하고 돌아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말이 없었다.

아마도,
그 집이 준 느낌이 머리 깊은 곳에서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음날 우리는 계약을 했다.
법과 현실 모두 안전할 거라는 얘기를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집이 주는 강렬한 느낌이 가장 큰 이유였다.
사실, 아무리 안전한 계약도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게 현실이니까,
이 정도의 불안한 조건이라면 조심스러운 사람들은 피해 가는 게 일반적이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이렇다.
부동산 법을 조금 공부해보면 이런 조건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경매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 생각보다 쉽게 공부할 수 있다)
물론 잘 알아야 한다. 섣불리 알고 덤벼들었다가 손해를 보는 경우도 많기 때문인데,
정확하게 판단을 할 수 있는 정도만 되면 남들이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피하는 값싼 물건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략 1~2개월만 공부하면 가능한 수준이다. 그 후에도 잘 모르는 부분은 많겠지만 그 정도 수준에서 판단하고, 그 수준을 벗어나면 제외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우리가 계약한 집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집주인은 투자를 목적으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몇 년 전에 경매로 나와서 싸게 산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세입자 문제로 골치 아픈 걸 싫어하는 성격이었고 덕분에 우리는 2년 계약 후에도 집세를 올리지 않고 재계약을 했다.
그냥 계속 살아주면 좋겠다는 얘기까지 들으면서 말이다.

깊은 숲 속을 걸어가는 모습

ⓒcopyright by 나람



한 달 뒤 이사를 했다.
첫날밤. 풀 벌레 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누웠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풀향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우연히 스치듯 본 다큐멘터리 한 편이 우리를 이 집까지 오게 한 것이다.

앞으로 여기서 어떤 생활을 꾸려가게 될지,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얼마든지 넓힐 수 있는 텃밭도, 오디와 앵두와 잣처럼 주변에 널린 과실도, 마당 가득 피어있는 질경이도, 잎사귀로는 차를 만들고 열매는 곶감을 만들어 먹을 만큼 넉넉한 감나무도, 저녁에 집에 돌아와 자동차 문을 열면 언제나 콧 속 깊이 들어오는 달콤한 풀향기도, 봄이면 마당 가득 피어나는 이름 모를 꽃들의 황홀한 모습도, 겨울이면 눈을 치워야하는 거대한 주차장도, 비가 많이 오면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옥상의 배수구도, 겨울 내내 얼지 않도록 관리해야하는 마당의 지하수도,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게 산 속에서 살며 도시로 출근을 하는 반쪽짜리 자연주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