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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제 이름은 알아서 뭐 하시게요?”



"제 이름은 알아서 뭐 하시게요?"

 

글쎄요, 그쪽 이름을 알아서 뭔가 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늘 이런 식으로 전화를 받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기분이 좋지 않은 날도, 컨디션이 나쁜 날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화 살인전화 포스터

영화 <살인전화, "Sorry, Wrong Number"> - 사진은 포스팅 내용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아침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모르는 번호였는데 사흘 정도 계속 걸려온 번호라 그냥 한 번 받아봤습니다.

대개는 이런 식이지요.

"안녕하세요. 고객님, 00캐피탈입니다."

그럼 대개 한 두 문장을 듣고 바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네, 저는 필요 없습니다."

그럼 전화가 끊깁니다.

뭐, 제게 필요한 전화는 아니지만 상대방은 전화를 이용해서 '일'을 하니까

제 전화번호를 어디서 알았는지, 돈을 주고 정보를 산 건 아닌지,

이런 것들은 묻지 않습니다. 물론 궁금하긴 합니다.

그리고 이런 개인정보가 '일'에 이용되는 데 약간의 불쾌감과 불안감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간단히 끊고 하던 일을 하는 게 제 선택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습니다.

"안녕하세요. 전화 뒷번호가 0000이신 고객님 맞으시죠?"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본인이 제 번호를 눌러서 전화를 해놓고는 그 번호를 묻고 있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네 그런데요."

"여기는 xx통신입니다. 고객님께서 가입당시 00서비스를 신청하시고 사용하지 않으셔서 전화드렸습니다."

"네?"

물론 저는 가입 당시 어떤 서비스를 신청하고 어떤 것을 제외했는지 정도는 스스로 선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되물었습니다.

"실례지만, 무슨 회사라고 하셨죠?"

"네 저희는 통신 4사가 연합해서…………………"

긴 얘기였습니다.

그리고 뭔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그러니까, 통신사에서 제 정보를 귀 회사에 제공했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제 번호와 가입 내용을 알고 계신다는 게 말이 안 되지요.

"아니요. 저희는 고객님 정보를 전혀 모릅니다."

어랏!!!!

그럼 애초에 아무 숫자나 눌러서 전화를 한 거란 말씀인가요? 

그렇게 아무 숫자나 일곱 개를 누르면 전화가 걸리던가요?

그렇게 되지도 않지만, 만일 그런 식으로 전화를 하셨다면 '가입당시 무슨 서비스' 운운 하신 건 거짓말이란 말씀이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제가 물었습니다. 이건 일종의 보복심리 같은 겁니다.

하지만 길가다가 만난 사람이 제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데 저는 그 사람의 이름도 모른다는 건 공평치 않은 거지요.

일단 상황을 공평하게 해놓고 대화를 이어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제 이름은 알아서 뭐하시게요?"

딸까닥.

 

……

   

지금은 많이 평상심을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전화가 그렇게 끊어지고 나자 화가 나더군요.

그래서 그쪽으로 전화를 하려고 했습니다. 발신버튼만 누르면 간단하니까요.

엄지손가락이 발신 버튼까지 갔다가 멈췄습니다. 이 동작을 몇 번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호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화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데까지 20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일로 감정에 빠져서 하루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게 당신의 일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전화를 거시면 받겠습니다.

하지만 제게 거짓말을 하거나, 일방적으로 제 정보를 손에 든 채로 

얼굴 없는 사람이 되지는 마십시오.

또, 필요한 말만 집어 던지고 전화를 끊지 말아 주십시오.

그건 일종의 폭력입니다.

마치 어두운 골목에서 얼굴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뒤통수를 치고 달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제게 그런 폭력을 사용해서 소중한 하루를 망치려 들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게 당신의 일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제가 당신의 일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할 권리는 없으니까요.

다만 폭력만은 절대 사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시 당신이 하는 일이 폭력이란 걸 몰랐다면 이제라도 그만 두시길 바랍니다.

이게, 이런 폭력을 당하고도 아무 말 하지 않는 

선량한 대다수 피해자들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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