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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삶

100년만에 우리에게 들리는 소리, 양자물리학의 세계



100년만에 우리에게 들리는 소리, 양자물리학의 세계


지구 상의 모든 생명은 그 구성물질을 거의 100% 가까이 공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외계에서 지구로 유입되는 물질이 있다고 해도 거의 측정이 불가능할 만큼의 적은 양이니,

수십억 년 간 지구에서 태어나고 살다 죽은,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생명과 무생물을 포함한 모든 것들은,

그렇게 서로 물질을 공유하고 순환하는 것입니다.

 

불교적인 사고방식으로 보면 우리는 전생에 바위였을 수도, 공룡이었을 수도 있는 셈입니다.

그런 모습을 이룬 물질 가운데 하나의 요소가 지금의 내 세포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럴까요?

 

보통,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은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체를 구성하는 물질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어떤 고유의 특성을 가진 개체가,

그 특성이 부족한 나를 보충해주는 것입니다.


영화 매트릭스 장면


하긴 20년 전만 해도 이런 사고방식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종의 신비주의나 미신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양자물리학Quantum physics이 물리학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은 게 이미 100년 가까이 되고 나니,

일반적인 사고의 틀 역시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양자물리학자들은 이 세계의 가장 작은 구성단위를 '끈'이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끈과는 조금 다르지만,

가늘고 기다란 형태라는 점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이 '끈'은 진동합니다.

마치 기타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의 줄이 진동하는 것처럼 특정한 파장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진동하는 끈이 모여 물리적인 단위가 됩니다.


Isaac Newton


뉴턴Isaac Newton의 물리학이 인류 전체의 상식이 되고 나서 거의 3백 년의 시간이 흘렀기에,

보통사람들에게 이런 이론은 이해도 어렵고 받아들인다는 건 정말 힘든 개념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 조상들, 

우리나라의 조상들 뿐 아니라 인류의 모든 조상들이 전해 준 얘기가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과학자들이 논리와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었기에,

그것은 신화와 전설이라는 운명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신화전설은 항상 비유가 가득한 스토리텔링으로 완성됩니다.

일주일 만에 천지가 창조되고, 소리로 우주를 만들어내고, 영원히 돌아가는 맷돌이 바닷물을 짜게 만드는 식이 됩니다.

아직까지 지혜보다는 어리석음에 가까운 우리들-현재의 인류는,

지혜로운 조상들의 이야기 속에서 감정적인 부분에 집중하게 됩니다.


주인공과 그 연인, 그들의 비극적인 사랑,

저주와 축복, 탄생과 죽음이 그런 것들입니다.



이제 과학이 신화를 증명하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조금씩 조상들의 시각으로 주변을 다시 보게 됩니다.


길가에 서 있는 가로수에서도, 화분에 갇힌 허브에게서도,

발끝에 차이는 작은 돌멩이에서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물방울 속에서도,


이미 내 안에 있었고, 어쩌면 내일의 내가 될지도 모를 요소를 만난다는 생각,

만물이 나와 같으며 동시에 다른, 같은 요소로 만들어졌지만 다른 파동을 생산하는 형제와 같다는 생각,

결국 모든 게 하나라는 모든 종교가 한 입으로 얘기하는 진리를 음미하게 됩니다.


양자물리학은 실험으로 입증되었고 그 해석은 이제 철학자에게 넘겨졌다는 아래의 글에서 

보통사람들이 우주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과학자는 현학적인 양자물리학 해석의 논쟁에서 벗어나, 방정식을 풀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실험을 했다. 그리고 이론이 실험 결과를 설명할 수 있으면, 아무 의문 없이 옳은 이론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더는 물리학 강의 시간에 양자물리학 해석의 문제를 다루지 않게 되었다. 실용성을 강조하는 미국이 과학의 중심지로 떠오른 것도 이런 경향에 일조했다.

 

결국, 양자물리학 해석의 문제는 완전히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로 물리학 문제가 아닌 철학의 문제로 옮겨가게 되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아직도 상자 속에서 자신의 문제가 철학적으로도 완전히 해결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곽영직 / 수원대학교 자연대학장의 <양자세계의 해석>에서 발췌